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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 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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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부는가 했더니 벌써 피겨 시즌이 돌아왔다.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시즌이라 그런지 더욱 두근거리고 기대되는 마음으로 한껏 부풀어 있는데, 무엇보다도 나를 가장 떨리게 하는 것은 바로 남자 싱글, 통칭 '짜르(국적이 러시아라서)'라고 불리던 제냐(예브게니 플루셴코)의 복귀다. 연아 덕에 피겨계로 입문했던지라 내가 피겨에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휴식기에 들어가 있었다. 덕분에 한창 활동하던 전성기때의 그를 실제로 보지는 못했고, 동영상으로나마 뒤늦게 접하면서 그 아름다운 경기들에 감동하며 아쉬워하곤 했었다. 아, 그때 나는 왜 피겨를 몰랐을까, 그 당시의 제냐를 생방송으로 보았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그런 아쉬움. 남자 싱글의 매력에 한껏 빠지게 해 주고, 피겨의 동영상을 보고보고 또 돌려보는 재미에 빠져들게 만들어버린 장본인 제냐. 그런 그가, 4년의 공백을 접고 이번 시즌에 복귀했다.
그의 첫 경기 당일인 러시아 대회에서 나는 학교의 밤샘 책 읽기 행사 진행중이라 생방송으로 보지는 못했고, 나중에 집에 오자마자 그야말로 가방 던져놓고 찾아보았다. 제냐의 쇼트, 그 짧은 시간동안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정신없이 그의 몸놀림을 따라가고 있었다. 아, 이래서 그를 짜르라고 하는구나. 아, 황제가 복귀했구나. 내가 일생에 그의 경기를 실시간 시즌으로 즐기게 되다니. 물론 제냐의 이번 쇼트는 절대 최고라고 할 수 없다. 그의 전성기 시절과 비교하면 심심한 안무와 애매한 스텝, 세간에는 단순히 '점핑머신'이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쿼드를 팡팡 뛰어내는 점프만큼은 최고이지만 그 외에 아무것도 없어서 전혀 감흥이 없다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내가 경기에서 느낀 것은 그냥 잘한다, 못한다를 떠나서 '압도적인 존재감과 카리스마'였달까. 단순한 손짓 하나에도 그가 하면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경기장을 장악하는 그 뚜렷하고 강렬한 존재감, 자신감, 오만한 긍지, '이것이 진정한 챔피언이다' 라고 느껴지는 관록과 여유와 커리어,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이제껏 남자 스케이터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어떤 충만한 아우라가 그를 완전히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 그래서 그를 짜르라고 하는구나. 프리와 갈라 프로그램까지 보고 나서 다시 한번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건 마치, 오만하고 무자비한 황제가 강림해서 양민을 학살하고 있는 느낌?; '압도적이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전하게 깨달았다. 이번 시즌 연아가 그렇듯이. 연아를 두고 '플루셴코 이후 최고로 무자비한 선수'라는 말이 있었다는데, 그거야말로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한다. 이건 제냐가 경기장에 등장했을 때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느낌, 그 장악력, 다른 선수들은 안중에도 없게 만들어 버리는 그 카리스마를 직접 느끼면 바로 이해가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동영상으로 본 게 이정도면 실제로는 도대체 어떻다는 거야. 나이도 적지 않은 제냐가 한창 전성기 선수들의 의지를 이렇게 꺾어버려도 되는건가, 싶을 정도로. 항간에는 '금 많이 먹었다 그만해라'라는 농담도 있다는데, 워낙 제냐 본인이 컴페티션을 즐기는 사람이라 금이나 은, 메달색에 연연한다기보단 그저 경기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라 그게 또 좋다. 야구딘 은퇴 이후 라이벌이 전혀 없고 목적이 없기도 했지만, 복귀 소감도 '경쟁이 그리웠다' 라니, 정말 이 오만방자하고 긍지높은 짜르같으니라고. 그런거 치곤 너무 긴장감이 없어 보이고 심히 여유스러워보여서 얄미울 정도지만, 그런 모습이 바로 제냐다워서 좋다. 나는 그런 그를 그리워하지 않았던가. 아, 행복한 피겨의 계절, 나의 짜르가 돌아왔다. 얼마나 오만하고 긍지높은 자신감으로 그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줄지, 예전 '니진스키에의 헌정'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얼마나 가슴이 뭉클할 감동을 안겨줄지 기대되지만, 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저 여러번 거친 무릎수술을 생각해서 건강하고 재기발랄한 모습 그대로 남아주기를. 그 어떤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나의 영원한 짜르. 그가 복귀했다.
주말에 집에 내려가서 이삿짐을 챙겼다. 사실 이삿날짜는 좀 여유있게 남은 10월인데, 급한 엄마 성격에는 어쨌든 빨리 짐을 정리해버리고 싶으셨던 것 같다. 덕분에 그동안 짊어지고 살은 오래된 내 짐들과 책, 잡동사니 등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몇 년 만에 빛을 보았다. 그런 거 이제 좀 버려! 버려! 하는 부모님의 외침을 등에 업고, 정말 마지막 짐 정리다 싶게 이 악물고 죄다 내다버렸다. 사실 버리는 짐이 대개 그렇지 않나. 없이도 잘 살아왔으면서 막상 버리자니 아깝고, 혹은 추억의 물건들이고, 다시 구할 수 없는 거라는 이유로 끌어안고 살게 되는. 그래도 꼭 챙겨놓고 싶었던 건 6살부터 써서 큰 묶음으로 엮은 일기장인데, 눈에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이미 내다버리셨단다. 아이고 그걸 왜 버리냐고, 그건 내가 결혼하더라도 싸 들고 가고 싶었던건데! 하면서 징징대니 엄마도 아쉬워서 어쩔 줄 몰랐던 마음이지만 과감히 버리셨단다. 흑흑, 진짜 내 주옥같았던 어린 시절 일기장. 내 청춘이여. 흑흑.
그게, 그냥 추억으로 아쉬운게 아니라 어릴 적 나의 일기가 정말 웃기기 때문에 그렇다. 좀 엉뚱한 꼬마였던 내 생활을 그대로 녹여둔, 정말 깜찍하고 황당무계한 일들도 많았고 가끔은 개념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듯한 어이없는 일기도 있었고, 안간힘을 써서 맞춤법을 지키려 했건만 난생 처음 하는 유치원 졸업식에 대해 쓸 때는 '졸업'이라는 단어를 본 적이 없어서 '조롭을 했다'라고 써 두었다거나(주변에서 졸업하잖니, 너 이제 졸업이야, 하는 말만 들었으니 그대로 받아적은 듯), 먹은 식단(특히 저녁식사)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빠지지 않는 화두였으며, 가끔 나이먹어서 읽으면 '어쭈 제법인데?'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예쁘게 적은 동시도 있었고, 엄마한테 혼난 날은 진지하게 '엄마는 우릴 사랑하시니까 혼내시는 거다. 반성하며 받아들여야겠다.'라고 애늙은이 같이 적어둔 것도 있고(하지만 저 때 난 6살인가 7살이었다!), 강아지를 처음 키우게 된 날은 강아지 깨갱거리는 모습을 묘사한답시고 '방울이가 깨갱거렸다. "깨갱깽깽 깨개개개개개개갱갱깽~ 으르르르르르릉 깽깽~ 캥캥캥캥깽깽~!!!" ' 이라는 말로 일기장 두 줄을 잡아먹은 일기도 있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열광한 만화영화들에 대한 순수하고도 오롯한 감정이 가득 담긴 감상문이 가득했단 말이다!!! 아기공룡 둘리를 보고 언니와 함께 손 잡고 "둘리 불쌍해~" 하면서 징징징 울은 거라든가, 개구리 왕눈이를 보면서 투투와 가재에 대한 꾸밈없는 분노를 드러내며 왕눈이를 응원한 거라든가, 꾀돌이 해마 위니가 나오는 인어공주(이거 꽤 마이너라 아는 사람 드물 것 같다;)의 심술머리 마녀를 타박하는 거라든가, 기타 등등등 등등등. 어린 시절의 나는 권선징악을 당연시 하며 정의는 우리 편, 언제나 승리한다는 대단히 투철한 흑백논리의 정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일기를 나이먹어서 보는 즐거움은 꽤 큰 것이다. 왜냐면... 나는 이제 둘리가 초 개념없는 또한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왕눈이 여자친구 아롬이 아부지인 투투. 솔직히 투투가 가재를 앞세워 왕눈이에게 한 잔악무도한 행위들이 잘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버지 심정에서 그럴 수 있다는거다. 물론 만화에서야 투투 개인의 욕심에 눈이 멀어 한 행동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아니 어느 아버지가 울지말고 일어나 피리를 부는 것 밖에 할 줄 아는게 없는 천애고아 가난뱅이한테 금지옥엽 딸을 내준단 말이더냐. 아직 아, 심히 말이 샜지만 어쨌든 어린 시절 동심과 정의감으로 꽉꽉 채웠던 일기장이 떠나가니 아쉽다. 지금이야 길동 아저씨와 투투를 응원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 어디 그게 가당키나 했었나. 둘리와 왕눈이를 위해 울었던, 그리고 분노와 꽉 찬 감정을 가득 메워 썼던 일기장을 떠나보낸 마음 심란하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인데. 오늘날 길동 아저씨와 투투를 이해하며, 떠나간 내 어린 시절 둘리와 왕눈이에게 작별을 고한다.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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