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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 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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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집에 내려가서 이삿짐을 챙겼다. 사실 이삿날짜는 좀 여유있게 남은 10월인데, 급한 엄마 성격에는 어쨌든 빨리 짐을 정리해버리고 싶으셨던 것 같다. 덕분에 그동안 짊어지고 살은 오래된 내 짐들과 책, 잡동사니 등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몇 년 만에 빛을 보았다. 그런 거 이제 좀 버려! 버려! 하는 부모님의 외침을 등에 업고, 정말 마지막 짐 정리다 싶게 이 악물고 죄다 내다버렸다. 사실 버리는 짐이 대개 그렇지 않나. 없이도 잘 살아왔으면서 막상 버리자니 아깝고, 혹은 추억의 물건들이고, 다시 구할 수 없는 거라는 이유로 끌어안고 살게 되는. 그래도 꼭 챙겨놓고 싶었던 건 6살부터 써서 큰 묶음으로 엮은 일기장인데, 눈에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이미 내다버리셨단다. 아이고 그걸 왜 버리냐고, 그건 내가 결혼하더라도 싸 들고 가고 싶었던건데! 하면서 징징대니 엄마도 아쉬워서 어쩔 줄 몰랐던 마음이지만 과감히 버리셨단다. 흑흑, 진짜 내 주옥같았던 어린 시절 일기장. 내 청춘이여. 흑흑.
그게, 그냥 추억으로 아쉬운게 아니라 어릴 적 나의 일기가 정말 웃기기 때문에 그렇다. 좀 엉뚱한 꼬마였던 내 생활을 그대로 녹여둔, 정말 깜찍하고 황당무계한 일들도 많았고 가끔은 개념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듯한 어이없는 일기도 있었고, 안간힘을 써서 맞춤법을 지키려 했건만 난생 처음 하는 유치원 졸업식에 대해 쓸 때는 '졸업'이라는 단어를 본 적이 없어서 '조롭을 했다'라고 써 두었다거나(주변에서 졸업하잖니, 너 이제 졸업이야, 하는 말만 들었으니 그대로 받아적은 듯), 먹은 식단(특히 저녁식사)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빠지지 않는 화두였으며, 가끔 나이먹어서 읽으면 '어쭈 제법인데?'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예쁘게 적은 동시도 있었고, 엄마한테 혼난 날은 진지하게 '엄마는 우릴 사랑하시니까 혼내시는 거다. 반성하며 받아들여야겠다.'라고 애늙은이 같이 적어둔 것도 있고(하지만 저 때 난 6살인가 7살이었다!), 강아지를 처음 키우게 된 날은 강아지 깨갱거리는 모습을 묘사한답시고 '방울이가 깨갱거렸다. "깨갱깽깽 깨개개개개개개갱갱깽~ 으르르르르르릉 깽깽~ 캥캥캥캥깽깽~!!!" ' 이라는 말로 일기장 두 줄을 잡아먹은 일기도 있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열광한 만화영화들에 대한 순수하고도 오롯한 감정이 가득 담긴 감상문이 가득했단 말이다!!! 아기공룡 둘리를 보고 언니와 함께 손 잡고 "둘리 불쌍해~" 하면서 징징징 울은 거라든가, 개구리 왕눈이를 보면서 투투와 가재에 대한 꾸밈없는 분노를 드러내며 왕눈이를 응원한 거라든가, 꾀돌이 해마 위니가 나오는 인어공주(이거 꽤 마이너라 아는 사람 드물 것 같다;)의 심술머리 마녀를 타박하는 거라든가, 기타 등등등 등등등. 어린 시절의 나는 권선징악을 당연시 하며 정의는 우리 편, 언제나 승리한다는 대단히 투철한 흑백논리의 정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일기를 나이먹어서 보는 즐거움은 꽤 큰 것이다. 왜냐면... 나는 이제 둘리가 초 개념없는 또한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왕눈이 여자친구 아롬이 아부지인 투투. 솔직히 투투가 가재를 앞세워 왕눈이에게 한 잔악무도한 행위들이 잘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버지 심정에서 그럴 수 있다는거다. 물론 만화에서야 투투 개인의 욕심에 눈이 멀어 한 행동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아니 어느 아버지가 울지말고 일어나 피리를 부는 것 밖에 할 줄 아는게 없는 천애고아 가난뱅이한테 금지옥엽 딸을 내준단 말이더냐. 아직 아, 심히 말이 샜지만 어쨌든 어린 시절 동심과 정의감으로 꽉꽉 채웠던 일기장이 떠나가니 아쉽다. 지금이야 길동 아저씨와 투투를 응원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 어디 그게 가당키나 했었나. 둘리와 왕눈이를 위해 울었던, 그리고 분노와 꽉 찬 감정을 가득 메워 썼던 일기장을 떠나보낸 마음 심란하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인데. 오늘날 길동 아저씨와 투투를 이해하며, 떠나간 내 어린 시절 둘리와 왕눈이에게 작별을 고한다.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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