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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 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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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한 달만에 '새글쓰기'를 누르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주 오랜 여행을 마치고 이제사 집에 돌아와 약간은 빡빡한 키를 열쇠구멍에 꽂고 돌리는, 그런 낯설은 느낌.
방학과 동시에 말도 없이 잠적해 버린 것이 굳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하튼 원치않게 이글루스도 방학한 셈이 되어버렸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놀기만 하는 방학'을 한번쯤 보내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 언제 이렇게 맘 편한 방학을 가져본 적이 있었나. 놀아도 눈치받지 않고 밤새워 게임해도 아무도 구박하지 않는 파라다이스!!! ...를 꿈꾸며 나는 야심차게 방학 첫날 오후 4시에 일어나는 기염을 토했지만. 직무연수와 독서캠프 준비교사로 보내는 방학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독서캠프는, 전국의 학생 100명과 교사 40명이 함께하는 큰 캠프였는데 이번에 준비 스텝이었던지라 방학 전부터 몇 차례 회의를 했었다. 사실 이번 방학은 독서캠프로 거의 다 날려먹었다고 해도 맞겠다. 계속 회의하고, 맡은 파트 준비하고, 읽어야 할 책을 읽고(어느새인가부터 책 읽는 것이 의무가 되니까 지겨워졌다), 워크샵까지 끝내고 나니 땀과 피로에 쩔은 촌닭같은 꼬라지가 되어 있더라. 아, 나의 상큼발랄한 신규 시절의 여름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그래도 2박3일간 진행된 독서 캠프, 정말 내가 장담컨대 내 인생에 이렇게 재미있고 배울 것 많은 캠프는 처음이었다. 항상 어느 캠프를 가도 참가자의 입장이었는데 이렇게 준비팀에서 진행하는 묘미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프로그램도 야심차게 준비해서 알찬 강사진을 구성했다. 박상률 작가의 좋은 강의를 듣고 황대권 선생님의 친필싸인을 받고 악수도 했다. 박경림씨가 임신중에도 와서 그 특유의 목소리로 감칠맛 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도서관에서 하는 추적놀이에서는 스피드 퀴즈 게임 진행을 맡았는데 아이들이 제일 재밌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아이들 스스로가 개그를 하니까 웃기지. (학생들에게 '동물농장'이란 단어를 설명하라고 하면 독서캠프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조지 오웰이 나오지 않는다..."일요일 아침 SBS에서 하는 동물 키우는거!" 라고 외치지를 않나, '연금술사'를 보자마자 파울로 코엘료가 아닌 "강철의 삐리리리!"를 외치는 너희를 보면서 선생님은...울었다 어흑!) 마침 둘째날은 내 생일이라서, 정말 나는 생각치도 못했는데 총 지휘 선생님께서 파티를 마련해 주셨다. 둘째날 마지막 축제를 끝내고 언제 준비하셨는지 케이크에 초까지 꽂아서, 정말 팔자에도 없는 140명의 생일 축하 노래를 들으며 촛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눈망울들을 보면서 참 마음이 벅찼다. 내 생애 최고의 생일. 전국구에서 모여들어서 구수한 사투리들이 어우러진 모둠 아이들. 물론 경상도 억양이 강해서 캠프 마지막날에는 경상북도 공화국이라거나 경상민국이라고 놀릴만큼 대부분 경상도 말씨를 흉내내고 있었지만, 처음 만나는 학생과 선생님들인데도 어쩌면 이렇게 친해질 수 있는 것인지. 사실 나는 '요즘 애들은 모두 거칠다'라는 말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나 재미있고 재기발랄하고 사랑스러운 녀석들이 많은데. 넘치는 끼를 춤과 노래로 마음껏 발산하고, 진지하게 토론해서 모둠책을 계획하고, 잠잘 때나 밥 먹을때 모둠에서 가장 나이어린 중학생 막내를 '막내야 막내야' 하면서 챙기는 이 어른스러운 아이들이 만들어갈 미래는 꽤나 밝을 것이라는, 나는 그런 긍정적인 확신을 했다. 뭔가 개학과 더불어 쓰는 오랜만의 새글이 어쩌다보니 독서 캠프 수다로 줄줄 흘러갔지만, 결국 결론은 돌아왔습니다- 라는 짤막한 이야기. 잠수 타는 동안 걱정해 주시고 문자로 안부까지 챙겨주신 이웃분들, 하나하나 너무나 고맙고 감사합니다. 괜한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그냥 실컷 놀다 돌아온 탕아를 맞는 기분으로 보아주세요. 히히. 제가 이 이웃분들의 따뜻함이 좋아서 이글루스를 하지요. 얼음집이 다 녹아내리도록 훈훈한 맛에 행복합니다. :) 여하튼, 불량교사(?) 칼릭스 이제 방학 마치고 빠릿하게 개학식 신고합니다!
어느새 상반기가 끝나갑니다. 나름 도서관도 안정 궤도에 올랐고 이제 슬슬 자리잡혀 가는 상황에서 정리해보는 울고 웃기. 이럴 때 애들이 이쁘고 이럴 땐 미워죽겠습니다, 라는 솔직한 토로.
- 이럴 때 이쁘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샘이 오고 나서 우리 도서관 너무 좋아졌어요!" -> 고맙다 흑흑. 싱글싱글 웃으면서 "샘 보면 사서교사 하고 싶어요~" -> 오오 진짜? 진짜?! 감격했어ㅠㅠ 신간도서 정리해 둔 것을 보면서 "우와,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어요!" -> 오냐 많이 읽고 쑥쑥 자라거라. 책이나 저자에 대해 설명해 줄 때 "와 신기해, 선생님 진짜 많이 아신다. 다 읽어보신거에요?" -> 음하하하 원래 이 직업이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하는거야! (...) 나름 옷과 화장에 힘준 날 "샘 오늘 예뻐요~" -> 눈치빠른 녀석, 고맙다 흑흑흑. 매우 이상한 척 고개를 갸웃거리며 "샘 남자친구 없어요?" "응, 없어. 묻지마!" "이상하다~있으실 것 같은데~" -> 으허헝. 아부라도 진짜 고맙다. 그리고 슬프구나. (...) 급식 후식으로 받은 요거트나 우유 가져와서 내밀면서 "전 싫어해요, 샘 드세요." 라고 하길래 "이럴 땐 그렇게 멋없게 말하는게 아니라 '샘을 위해서 제가 먹고 싶은걸 참았어요~드세요~'라고 하는 거다!" 라고 가르쳐줬더니 고대로 따라할 때. -> 시킨다고 또 해요. 이쁜 것들. 학생증 없다길래 발급받을 때까지만 학생증 없이 대출해주겠다고 봐줬더니 초코파이 가져와서 수줍게 내밀면서 "제가 맘에 드는 사람한테만 주고 있어요~" 할 때. -> 처세술 뛰어난 녀석...넌 이다음 절간에 가도 새우젓 얻어 먹을거다. 나와 취향이 비슷해서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 서로 침튀기며 열띤 수다를 떨 때 -> 흑, 사실 이래보여도 선생님이 너네랑 나이차가 X년 밖에 안나서 말이지! 온라인에서 만났다면 서로 '모모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ㅠㅠ 남자애들의 되도 않는 눈웃음과 애교가 작렬할 때. "아흥~선생님 이번 한 번만요~" -> ...이번엔 넘어가지만 딴데가서 하지마라... 젊게 볼 때. "샘 몇 살이세요? 음...스물 둘? 스물 셋?" -> 니가 세상에서 제일 이쁘다. - 이럴 때 패주고 싶다. 도서관 취급 안 할 때. "도서관이나 대여점이나 그게 그거잖아요? 만화책이랑 판타지 좀 들여놔주세요." -> 넌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자. 교사 취급 안 할 때. "솔직히 선생님 얼마 받아요? 도서관 관리 직원하려면..." -> 사실 이것이 스트레스의 요인 중 하나. 아직 사회에서의 사서교사의 인식과 입지에 대해 앞으로 평생 고군분투해야 함을 절절히 깨닫는 부분. 교사 공간에 침투(?)해서 책상 서랍 열어보는 등 무례하게 굴 때. "샘 여기 사탕 제꺼!" -> 학생으로써 선생님께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 아니 그리고 왜 하필 먹을 걸 훔쳐가냐고!ㅠㅠ 다른 학교랑 비교할 때. "우리학교 도서관 꼬졌어요! 중학교 때 도서관은 훨씬 넓고 크고 책도 더 많고..." -> 그럼 중학교로 돌아갓! 기껏 신간 들여놨는데 책 없다고 투덜댈 때. "아 솔직히 진짜 읽을 책 없네. 쩔어요." -> 네녀석 말에 내가 더 쩐다. 자기가 책 많이 읽는다고 거만하게 굴 때. "우리학교 애들 수준 솔직히 너무 낮아요. 대출 1위가 강풀책이라니 부끄러워요." -> 지금 네놈 손에 들려있는 '드래곤 라자'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는 바이오. 아니 물론 라자는 나도 좋아하지만. (...) 기본적 개념을 내다버린 놈들을 볼 때. -> 사실 여기에 기타 모든 사례 포함. 경우가 너무 많다. 종 쳐도 '선생님이 아직 안 왔다'고 하면서 교실로 돌아갈 생각을 않는다거나, 말버릇 고약한 놈들이라거나, 버릇없게 군다거나, '학생증 없으면 대출해 주지 않겠다'는 것을 제일의 원칙으로 세우고 있다고 몇 번을 말해줘도 그냥 무조건 해달라고 짜증낸다거나. 뭐, 기타등등 기타등등. 늙게 볼 때. "샘 몇 살이세요? 음..스물 여덟? 스물 아홉?" -> 넌 오늘 끝나고 좀 남아라. 개인 상담 들어간다. 애들은 참 영악해서, 열 번 중에 여덟 아홉번쯤은 미운짓을 하고 한 두 번만 이쁜짓을 합니다. 근데 그 한 두 번으로 여덟 아홉의 미움을 덮는다니까요. 미운짓 여덟 아홉 때문에 애들말로 정말 '쩔어가다가' 딱 그 한 두 번 때문에 일할 맛 납니다. 이런 초딩의 탈을 쓴 고딩놈들 같으니! 엎어놓고 곤장 백 대쯤 쳐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가도 안녕하세요~하면서 고개를 꼬박 숙이는 애들을 보면 그냥 또 슬슬 풀어져버리고. 어른을 농락하는 무서운 놈들입니다. 요즘 애들은. 학기 마무리 때문에 정신없이 보내고 오후가 넘어가면 늘어지는 하루하루입니다. 그래도 진짜, 애들 때문에 웃게 되는 일이 소소하게 참 많네요. 오늘은 다독자 시상을 하려고 상장을 만드는데 옆에 와선 특이한 상장을 만들어달랍니다. 자기 별명이 흑염소니까 그거 관련으로. 몰래 남는 상장 종이로 이름 흑염소, 등급은 몸보신 1등급, 국민 건강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므로 이에 상장을 수여함...같은 걸 만들어줬더니 좋아 죽으려고 하는군요. 옆에 있던 친구는 비버라고 해서 연못 수질오염에 지대한 공헌을 한 환경파괴 1등급 상장을 만들어 줬습니다. 상장에 또박또박 박힌 궁서체의 압박이 크군요. 여하튼 녀석들은 신났습니다. 1학기 동안 이래저래 힘든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결국 애들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다시 태어나도 난 이 직업을 선택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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